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58

Transcript of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Page 1: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Page 2: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시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그의 적대적 활동 지속 중. 17:00시 현재 앙드라에서 총

200,000마리로 추정되는 저그 군단 공격 중. 카우코바라와 네빌 항구는 더드카

장군의 명령에 따라 봉쇄 완료. 뉴 헬싱키, 켈러턴, 안라코 대륙의 대다수

지역에서도 봉쇄 준비 중.

17:00시 현재 테란 사망자 수 15,000명으로 추정.

—교신 종료—

###

대외비

Page 3: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통신 ID: 309209

자치령 국가 안보국

타카시 쿠르쿠가 칼 페리웨그에게 전송한 보안 영상 교신 내용

드디어 앙드라의 난장판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게 됐군. 내 대원 중 하나가 눈먼

악마 작전에 쓸 실험체를 확보했어. 나중에 나한테 술 한턱 쏘라고.

연구실 책임자로 누구를 앉힐 생각이지? 난 당연히 필리파야.

이 채널로 빠른 응답 기다리지. 이상. 쿠르쿠, 통신 종료.

—교신 종료—

###

대외비

통신 ID: 309213

자치령 국가 안보국

칼 페리웨그가 타카시 쿠르쿠에게 전송한 보안 영상 교신 내용

페리웨그: 타카시? 미안, 교신을 놓쳤어.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올 줄은 몰랐거든.

쿠르쿠: (웃음) 믿음이 없는 자로다.

페리웨그: 아직 지상이야?

Page 4: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쿠르쿠: 아니. 필요한 거 챙겼는데 뭐하러. 뭔지 보고 싶어?

페리웨그: 볼 수 있어? 어디에 보관 중인데? 자네 숙소?

쿠르쿠: 아니, 그렇게 빨리 도착하는 건 컬런이나 가능하지.

(웃음)

쿠르쿠: 지금 자네가 있는 쪽으로 가는 중이야. 물건은 안전해. 연구팀의

책임자는 누구로 할지 결정했어?

페리웨그: 생각 중이야.

쿠르쿠: 생각할 게 뭐가 있어? 브로드허스트가 딱이지. 이런 일에 익숙하잖아.

페리웨그: 브로드허스트 박사는 좀—

쿠르쿠: 그 사람 연구실에 가 본 적 있어?

페리웨그: 아니.

쿠르쿠: (웃음) 하긴, 거기까지 살펴보는 건 좀 과한가. 그런데 말이야, 난 가

봤어. 실험을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것 같더라고. 무슨 뜻인지 알아? 기술자들

준비가 다 돼 있더란 말이지. 박사도 그렇고.

페리웨그: 하지만 그 사람은 좀 유별난 데가 있잖아. 내 생각에는 핀치 박사

같은 사람이 좀 더—

Page 5: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쿠르쿠: 핀치는 우리한테 필요한 경험이 없어. 소장님도 내 의견에 동의하실걸.

쿠르쿠: 칼? 듣고 있어?

페리웨그: 소장님은 브로드허스트랑 일해 본 적이 없잖아. 난 있어, [삭제됨]에

있을 때.

쿠르쿠: 그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네.

페리웨그: 그래, 자네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아. 하지만 자네가 [삭제됨]을

안다면, 내가 왜 이러는지도 알겠지.

쿠르쿠: 잘 생각해, 칼. 이건 전쟁이야. 이상. 쿠르쿠 통신 종료.

—교신 종료—

###

대외비

통신 ID: 3092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수신자: 필리파 브로드허스트 박사

발신자: [삭제됨]

임무 공지

Page 6: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필리파 브로드허스트, 즉시 #980 기지로 출두하여 코드 2908DX9, 눈먼 악마

작전에서 귀하가 맡은 역할에 대한 명령과 지시를 확인하십시오. 눈먼 악마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료하면, 안보국 기록에 남아 있는 귀하의 감점 요인들이 말소될

것입니다. 즉시 응답 요망.

#

그는 반들반들한 바닥을 발톱으로 똑딱대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발에서 차갑고

매끈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상하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가 살고

있는 말랑하고 따뜻한 거대괴수의 조직과 달랐다.

한 바퀴 돌면서 그는 탁, 탁, 탁 울리는 소리를 듣는다. 있어야 할 곳인 칼날

여왕의 거대괴수에서 여왕을 따라 신경 중추를 가로지를 때처럼, 빨리 걸으면 그

소리도 두 배로 늘어나는 것 같았다. 그의 발소리가 여왕의 발소리와 비슷했을까?

여왕은 죽지 않았다. 응당 있어야 할 곳에 존재하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 뒤편에서

들려오는 끊임없는 속삭임, 혼자일 때도 혼자가 아니라고 상기시켜 주는 확신이

아직 남아 있었다.

다른 저글링들도 그를 따라서 이 이상한 원형 방의 벽을 계속 빙빙 돌았다.

그는 걸었다. 탁, 탁, 탁. 하지만 그의 발소리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Page 7: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이상하고 공허한 곳.

다른 저글링들은 여전히 그를 따라왔고, 그는 그런 무리와 함께 여기 갇혀 있는

게 화가 나서, 몸을 홱 돌리고 으르렁대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부딪힌 것은 다른

저글링이 아니었다! 바닥처럼 매끈하고 반들반들한 벽이었다. 머리를 흔들고, 그는

다시 으르렁거렸다. 벽의 저글링도 따라 했다. 보아하니 방금 공격으로 녀석은 다친

모양이었다. 한쪽 뿔의 뾰족한 부분이 사라지고 없었다.

발톱으로 바닥을 긁자, 벽의 저글링도 따라 했다.

몸을 웅크리자, 벽의 저글링도 따라 했다.

그는 벽에 가까이 다가갔다. 갑자기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칼날 여왕이 명령을 내리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게 되는 것과 똑같은 느낌. 이해.

그는 이해한 것이다.

저 벽의 저글링은? 자신이었다.

직접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자신이 무리의 다른 개체들과 무척

닮았다는 것이 기뻤다. 그는 군단의 일부가 확실했다. 하지만 이곳에 군단은 없었다.

그는 혼자였다.

Page 8: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그는 날개를 펄럭여 벽에서 날개가 똑같이 펄럭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칼날 여왕이 저그를 불러 임무에 내보낼 때 느끼는 감정일까? 칼날 여왕이 움직이면

그들도 움직였다. 떨어져 있어도 늘 함께였다.

부러진 뿔, 그는 벽에 비친 자신을 보며 생각했다. 칼날 여왕은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탁, 탁, 탁. 이렇게 혼자 있는 느낌이 싫었다. 아직도

칼날 여왕이 내린 마지막 명령의 기억이 생생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행동하라고

명령하면, 어떻게 될까? 칼날 여왕을 위해 싸울 수 없다. 이상하고 텅 빈 장소에

갇혀 있으니까.

무슨 소리가 들렸다. 퉁 하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소리였다. 공격

태세를 취했지만 갑자기 새하얀 불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뜨겁게 타오르는

하얀색 빛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리를 꿰뚫는 날카로운 고통에

앞으로 고꾸라졌고, 차갑고 매끈한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발을 버둥대며 일어나려 했지만, 하얀 불꽃은 더 크게 타오를 뿐이었다. 그는 괴성을

지르며 울부짖었고, 눈부신 불빛은 곧 잦아들었다.

그리고 사냥감의 연한 살이 풍기는 악취가 났다. 순간적으로 본능이 들끓었다.

Page 9: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공격해!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화끈거리는 무거운 몸뚱이로 미동 없이 누워

있는 것뿐이었다.

두 사냥감이 방으로 들어왔다. 놈들의 몸에서 흐르는 따뜻한 피 냄새에 그가

사납게 쉭쉭대며 으르렁거렸다. 놈들은 그가 전투할 때 늘 보아 왔던 딱딱한 금속

껍데기를 입지 않았는데도, 전혀 주춤하는 기색이 없었다. 반짝이는 날개물질로

몸통과 팔다리, 얼굴을 감쌌을 뿐, 그렇다고 날아서 피할 생각도 아닌 것 같았다.

놈들이 서로 수런거렸다. 저글링은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으르렁댔지만,

그것마저도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불빛이 가득한 사각형에서 사냥감 두 마리가

더 들어왔다. 새로 들어온 둘이 금속판을 가져와 저글링 옆에 끌어다 놓았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는 발버둥치며 발톱을 휘두르려 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발톱 없는 이상한 앞발로 놈들이 그의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를 둘러싼 채

서로 수런대며 짖어대는 걸 보며, 저글링은 가슴 철렁한 분노와 함께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벌어지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놈들이 그를 들어 올려 금속판 위로 옮기는 동안, 저글링은 길고 낮은 소리로

울부짖었다.

Page 10: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그가 빛나는 사각형 쪽으로 밀려 갔다. 필사적으로 칼날 여왕을 불렀지만, 그녀는

별보다도 먼 곳에 있었다.

불빛이 그를 덮쳤다. 그를 쓰러뜨렸던 불빛만큼이나 밝고, 날카롭고, 깨끗했으며

무겁게 축 늘어진 다리에 따끔한 고통을 안겼다. 저글링은 움직일 수 없는 머리

대신 눈을 이리저리 굴려 주변 환경을 파악하려 애썼다. 불빛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금속판은 그를 태우고 가더니 금속 막대와 둥글게 말린 전선의 숲 옆에서

멈췄다.

날카롭게 끼긱대는 소리와 함께 판이 덜커덕대며 위로 올라갔다. 끔찍하도록

축축한 앞발 여러 개가 그를 만지작거리며 턱과 날개를 잡아당겼다. 놈들은 그에게

보라색 불빛을 비추더니 더 시끄럽게 수런거렸고, 으르렁대거나 물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앞발이 사라졌다. 보라색 불빛이 희미해졌다. 끝인가? 끝난 건가? 이제 놈들을

공격해서 죽이고, 물고—

갑자기 옆머리에서 잔인하고 차가운 불빛처럼 눈앞을 새하얗게 태우는 끔찍한

Page 11: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고통이 솟구쳤다. 포효하려 했지만 입이, 턱이 뻣뻣하게 굳어 그럴 수가 없었다.

머리 깊은 곳까지 파고든 고통은 중추에 다다라서는 초신성이 터진 것처럼

극심해졌다.

사냥감이 수런댔다.

기계가 윙윙거렸다.

방의 반들반들한 벽 덕분에 자신의 생김새를 알게 된 그는 펄쩍 뛰어올라 낫발과

발톱, 송곳니를 사정없이 휘두르며 새하얀 벽에 뜨겁고 진한 피를 뿌리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발톱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머리의 중추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점차 바깥으로 퍼지며 척추까지 타고

내려왔다. 마디 하나하나가 타는 듯이 고통스러웠지만 멈출 방법이 없었다. 움찔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윙윙대는 소리가 멈췄다. 온몸이 빠르게 뛰는 맥박처럼 욱신거렸다.

어디선가 금속끼리 철컥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어쩐지 소름끼치게 칼날

여왕을 떠올리게 하는 경쾌한 고음의 목소리가 무언가를 묻는 듯한 소리를 냈다.

보라색 불빛이 그를 비췄다. 눈을 찌르는 불빛에 고통이 파도처럼 솟구쳤다.

Page 12: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더 많은 사냥감이 수런거렸다. 칼날 여왕을 닮은 목소리가 만족스러운 듯한

소리를 냈다.

다음 순간 또다시 놈들의 손에 밀려 그는 새하얀 불빛을 거쳐 환한 방으로

옮겨졌다. 또 몸을 만져댈 거라는 생각과 달리, 놈들은 금속판을 기울여 그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바닥에 부딪힐 때의 고통은 엄청났다.

눈앞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하얗게 밝아졌다. 그리고 회색. 차갑고, 끝이 보이지

않는 잿빛.

방에는 그 혼자뿐이었다. 사냥감들은 가고 없었다. 하얀색 사각형도 없었다.

부러진 뿔은 여전히 꼼짝할 수 없었다.

그는 건너편 벽에 비친 부러진 뿔을 바라봤다. 힘없이 축 처져 널브러진 모습이

쓸모없어 보였다. 머리에 난 구멍에서 피가 스며 나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적어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었기에. 그리고 생각을 뻗어—

무언가가 잘못됐다.

다시금 극심한 공포가 엄습했지만 할 수 있는 건 힘없이 그르렁대는 것뿐이었다.

벽에 비친 부러진 뿔이 광기에 찬 커다란 눈으로 송곳니를 드러낸 채 그를 마주

보았다.

Page 13: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그녀가 없다. 칼날 여왕이.

없다.

부러진 뿔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뜨겁고 텅 빈, 시커먼 바다를 표류했다.

머릿속에 명령을 속삭여 줄 여왕이 없다. 부러진 뿔은 방향을 잃고, 목적을 잃었다.

홀로 끔찍한 공허에 갇힌 채, 우주의 무질서한 혼돈 속에서 길을 잃었다.

#

그녀는 잔해 위에 널브러져 있는 워필드를 찾아냈다. 철근 하나가 노병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늘 자신 곁에 머무는 뿔이 부러진 저글링을 먼저 워필드에게 보냈으나

녀석이 그를 찢어발기기 바로 직전에 뒤로 물렸다.

"케리건." 워필드의 거친 목소리에선 혐오감이 묻어났다.

케리건은 듣고만 있었다. 지껄이고 싶으면 지껄이라지.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철근이 전투복을 뚫고 쓸모없이 늘어진 몸뚱이에 깊이 박혀 있었다.

몇 분 후면 그녀의 저그가 이 행성을 차지할 터였다.

케리건은 그의 간청과 같잖은 항변을 들었다. 병사들이 다쳤다는 둥, 그녀가

비인간적이라는 둥. 둘 중 무엇도 케리건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를

이해하기에 워필드는 너무나도 약했으니까.

Page 14: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케리건은 생각의 가장자리에서 저글링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명령만

내리면 녀석이 워필드의 전투복을 찢고 노쇠한 그의 몸에서 두껍고 시뻘건 밧줄

같은 내장을 끄집어내리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게 두었다. 분노가 향하는 대상은 그가

아니었다.

그때 노장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 이름을.

"레이너가 널 보면 뭐라고 할까?" 워필드의 으르렁거림에, 케리건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솟구치며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가득 채웠다. 철근이 노장의 가슴에 깊이

박히며 꾸르륵대는 소리와 함께 몸이 축 늘어졌다.

케리건은 미동 없이 자신 옆에 서 있는 저글링을 내려다보았다. 녀석의 시선은

워필드의 시체에 박혀 있었다. 케리건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미 저그에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려 놓은 터였다. 테란 부상병들 따위야 도망치든 말든 상관

없었다. 워필드의 말이 맞았다. 그들은 그녀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

케리건은 몸을 돌려 성큼성큼 잔해 사이를 나아갔고, 언제나처럼 저글링이 그

뒤를 따랐다.

#

Page 15: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걷기가 힘들었다. 방 안을 돌아다녀 보려고 했지만, 방이 옆으로 빙그르르 돌았다.

한 발을 들어 올리면 발톱이 다른 쪽 발을 찔러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방향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 걸까?

놈들이 칼날 여왕을 앗아가며 몸의 일부도 함께 가져간 것 같았다. 그는 지금

균형을 잃었다. 한쪽으로 치우쳤다.

하지만 어지럽게 빙빙 도는 방 안을 어떻게든 걸으려 저글링은 힘을 그러모았다.

머릿속에 자리한 공허가 너무나 끔찍하고 증오스러웠다. 칼날 여왕의 무게를 되찾을

방법은 이곳을 빠져나가 그녀를 찾는 것뿐이었다.

몸을 질질 끌며 매끄러운 바닥을 헤매고 있을 때, 다시 불빛이 비치고 새하얀

고통이 그를 날카롭게 꿰뚫었다. 바닥에 쓰러졌을 때는 꼼짝도 할 수 없었고,

목구멍이 조여들어 죽어 가는 생물의 가냘픈 낑낑거림 외에는 분노의 포효조차

터뜨릴 수 없었다.

불빛이 잦아들자 저번처럼 약해 보이는 사냥감들이 그를 데리러 왔다. 놈들은 텅

빈 냄새가 났던, 똑같은 환한 방으로 그를 데려가 금속판에 고정시켰고, 발톱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이번에는 놈들의 수가 훨씬 적었지만 지난번에 있었던 놈들이라는 건 분명했고,

Page 16: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역시나 희미하게 반짝이는 날개 같은 물질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놈들은 전처럼

시끄럽게 수런대지 않았지만, 통일성이 느껴지는 움직임에 불현듯 부러진 뿔의

가슴속에 불안감이 차올랐다. 그도 동료 저그들과 저렇게 움직였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군단의 춤이었다.

그는 놈들이 앞뒤로 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머리를 움직일 수가 없어서 놈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는, 저

앞의 흠 하나 없는 새하얀 벽에서 깜박임 없이 붉은 빛을 발하는 은색 상자를 볼 수

있었다.

뒤에서 윙윙대는 소리가 났다. 금속의 울림. 놈들이 사는 금속 거대괴물의

냄새처럼 생소하고 불쾌한, 이상한 냄새가 공기 중에 퍼졌다. 귀에 거슬리는

사냥감들의 수런거림.

그는 붉은 불빛을 응시했고 불빛은 점차 커져 온 세상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빛이 갑자기 밝고 고통스러운 녹색으로 바뀌었다. 무언가가

쉭쉭대고 다시 쨍하는 소리가 울린 후, 갑자기 터져 나온 수군거림을 제외하면

주위가 고요해졌다.

불빛은 다시 붉은색으로 돌아왔다.

Page 17: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한 사냥감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차림새는 다른 사냥감들과 똑같았으나 움직임이 달랐다. 놈은 어깨를 뒤로 쫙

펴고 머리를 꼿꼿이 들고 있었다.

놈이 고개를 끄덕이자, 또다시 사냥감들이 군단의 춤을 시작하며 그의 주변을

둘러쌌다.

다시 윙윙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고통. 너무나 생생하고 엄청난 고통, 몸 전체를 집어삼키는 고통이었다.

포효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몸을 찢는 고통에, 사냥감들의 수군거림이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보라색 액체가 후드득 벽에 튀었다.

한 놈이 그의 시야 안에서 움직였다. 처음에 보이는 건 몸통, 놈들이 모두 입고

있는 이상하고 부드러운 외골격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놈이 몸을 숙였다.

부러진 뿔은 예리한 시력으로 놈의 정체를 알아봤다. 놈이 바로 이 군단에

명령을 내리는 우두머리였다. 칼날 여왕을 너무나도 떠오르게 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Page 18: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놈과의 거리가 가까워 금방이라도 후려쳐 턱으로 머리를 으깰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송곳니를 드러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우두머리가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그녀는 칼날 여왕이 종종 그랬던

것처럼 입으로 이상하고 알 수 없는 방식으로 곡선을 그리며, 눈을 이리저리 굴려

그를 관찰했다.

그녀가 무언가를 말했다. 그녀의 앞발이 옆구리에 닿는 순간, 새로운 고통이

찾아왔다. 그의 목구멍에서 작고 무의미한 울부짖음이 새어 나왔다. 두꺼운 혀가

그가 몸에서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었다.

그녀가 시선을 들어 빠르게 무언가를 말했다. 그 즉시 다시금 고통이 밀려들며

윙윙대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고통이 파도처럼 그의 몸 전체로 퍼지는 동안, 그녀는

몸을 숙이고 고개를 기울인 채 그를 지켜봤다. 그들 모두를, 다른 사냥감들 모두를

지켜봤다. 적 여왕.

그녀를 죽여라, 그는 머릿속에서 칼날 여왕은 아니지만 칼날 여왕처럼 명령하는

목소리를 생각했다. 그녀를 죽이면 남은 놈들도 모두 죽일 수 있다.

다음 순간, 견딜 수 없이 끔찍한 고통이 눈앞을 새하얗게 태웠다.

#

Page 19: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케리건은 축축한 증기가 둥글게 피어오르는 진화장으로 들어섰다. 습기가 이슬이

되어 그녀의 얼굴에 맺히고, 변태 과정에서 생성되는 달짝지근한 썩은 내가

풍겨왔다.

아바투르가 구근 같은 머리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는 몇 미터 떨어진 진화

구덩이 옆에 서 있었고, 구덩이 안에서는 새 생명이 맥동하며 출렁대고 있었다.

"준비됐음." 그가 발톱으로 구덩이를 가리켰다. "실험. 자가라의 진화에 대한 정보

제공 예정."

케리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리건에게 그러했듯, 진화는 무리어미에게 전략의

근본을 이해할 수 있게 할 터였다. 매우 까다로운 요구였지만, 지시한 대로

아바투르가 신속하게 작업을 진행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먼저 열등한 개체를

이용한다. 아마 저글링일 것이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구덩이의 표면이 더욱 사납게 요동치면서 가장자리에서 액체가 울컥 흘러나왔다.

"곧 완료 예정." 아바투르가 말했다. "지켜봐야 함. 기다릴 것."

아바투르가 구덩이 쪽으로 손을 내렸다. 표면 아래서 그림자 하나가 움직이며

발톱으로 끈적한 점막을 찢고 나오려 했다.

Page 20: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완전히 부화한 다음에 날 불렀어야지." 케리건은 그렇게 질책하면서도 구덩이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 보통의 저글링이 아는 것보다 더욱 위대한 목적을 깨우치기

위해 부화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는 어딘가 아름다운 데가 있었다.

아바투르가 조작한 변형의 결과물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케리건이 팔짱을 꼈다. 표면이 거의 다 찢어졌을 즈음—

갑자기 아바투르가 투덜대며 구덩이에 집게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다시

난폭한 동작으로 끈적한 변형액을 튀기며 저글링을 끄집어냈는데, 그 덩어리가

케리건의 발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지면서 바닥에 부딪히고 미끄러져 긴

연두색의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의 중심부에 눈에 익은 개체가 있었다.

녀석은 일어서서 발톱과 이빨, 곤충의 날개를 드러내며 코를 킁킁댔고, 구슬 같은

노란색 눈이 밝게 빛났다. 진화를 거쳤음에도 뿔 하나가 부러진 상태인 건 여전했다.

"그 녀석을 골랐군." 케리건이 이마를 찌푸렸다.

"맞음. 훌륭한 선택. 식별하기 쉬움."

저글링이 몸을 흔들어 거미줄처럼 얽힌 변형액 찌꺼기를 털어냈다. 어슬렁대며

앞으로 걸어 나오는 녀석의 검은 비늘에서 이따금 인광이 번쩍였다.

Page 21: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효과가 있는지는 어떻게 알지?" 케리건이 물었다.

저글링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녀석의 두 눈은 전보다 훨씬 밝았다. 빛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지켜봐야 함. 관찰 필요." 아바투르가 저글링을 보며 기다란 집게 손을 마주

두드렸다. "변화가 성공적이라면, 자가라에게도 같은 조치 예정."

저글링은 천천히 한 바퀴 돌면서 주변 환경을 눈에 익혔다. 그러다 케리건이

시야에 들어오자 멈춰 서서 그녀를 올려다봤다.

"네가 어떻게 변했는지 볼까." 그녀가 속삭였다.

#

대외비

통신 ID: 312099

자치령 국가 안보국

필리파 브로드허스트가 [삭제됨]에게 전송한 보안 녹음 교신

필리파 브로드허스트 박사입니다. 작전 절차에 따라 [삭제됨]의 제 사무실에서

녹음 중입니다.

눈먼 악마 작전의 1단계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는 소식을 보고하게 되어

Page 22: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기쁩니다. 저희 팀과 저는 [삭제됨]에서 했던 작업을 어려움 없이 재현했고 실제로

이전 작업과 비교해서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습니다.

아서 바클리 박사가 개발한 열상 수술 기법을 사용해서 실험체를 저그 군단에서

완전히 단절시키는 작업에 성공했습니다. 실험체가 방향 감각과 운동 기능 상실

증상을 보였으나 계속 작전을 진행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자연은 진공 상태를 싫어하더군요. 아니, 이 경우에는 실험실이

싫어한다고 해야 할까요? (웃음.) 죄송합니다, [삭제됨]. 고된 하루였거든요.

실험체를 군단에서 완전히 단절시킨 후, 다음 단계로 실험체의 중추 신경계를

제거하고 시험용 척수 제어 장치를 이식했습니다. 아직 실험체에 대한 관찰이 더

필요하지만 이식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실험체의 몸에서 척수 제어 장치에 대한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2단계인 척추 프로그래밍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 단계에서도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릴 수 있으면 좋겠군요.

이것으로 보안 절차에 따라 기록되고 보안 채널 0982D, 20983E, 혹은 39082N을

통해 즉시 [삭제됨]에게 전송되는 간략한 연구 보고를 마칩니다.

이상, 브로드허스트 통신 종료.

#

Page 23: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케리건이 무리어미들에게 명령을 내린 후 거대괴수의 신경 중추를 나서는데, 신경

경로에 있는 주머니 방 하나에서 저글링이 잽싸게 나와 그녀 앞에서 멈춰 섰다.

"너." 그런 저글링의 모습이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이곳에 있을 때는 자주

그랬듯이, 아까 녀석에게 거대괴수의 반대편에 있는 저글링의 방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던 터였다.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힌 작은 방들과 좁은 신경 경로에는

저글링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 없었다.

"명령을 내리지 않았느냐." 케리건은 몸에서 피의 흐름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무릎을 굽혔다. "너 혹시—?"

저글링이 그르렁대며 날개를 펄럭였다.

우연이다. 분명, 실수일 것이다. "무리와 합류해라." 케리건은 다시 명령을 내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녀석이 따라왔다.

케리건이 멈추자 저글링도 멈췄다. 그녀는 한순간 뜨겁게 솟구치며 맥동하는

분노에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아바투르의 임무는 통찰력을 이해할 수 있는

저글링을 만드는 것이었지, 그녀의 명령을 거역하는 저글링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무리와 합류해." 그녀가 마지막으로 저글링을 복종시키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의

Page 24: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강력한 의지를 담아 명령했다. 이런 저글링이라도 복종시킬 수 있는 의지였다.

마침내 녀석이 몸을 돌렸다. 케리건은 녀석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진화장으로

향했다.

자욱한 증기와 습기 한가운데 아바투르가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녀가

으르렁댔다. "녀석이 내 말을 거역했다."

아바투르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향상된 정신. 생각할 수 있음. 더 강력한 명령

필요."

더 강력한 명령이 필요한 저글링이라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바투르의

쓸모는 인정하지만 그를 완전히 신뢰하는 것도 아니었다. 케리건이 안광을 빛내며

진화 군주에게 고통을 가했다.

"실험. 결과를 도출함." 그가 더듬대며 말했다. "자가라에 대한 작업 가능."

그를 놓아준 뒤 케리건은 돌아섰다. 아바투르가 짜증나기는 해도 그가 일군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자가라의 정신도 저글링처럼 성장할 터였다.

아마도 그것이 저글링이 진화장 바깥에서 그녀를 찾았을 때 그냥 머물게 둔

이유일 것이다.

무리어미 하나보다는, 저글링 한 마리가 낫지.

Page 25: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녀석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예전처럼 케리건의 방에서 신경 중추까지 그녀가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다녔고, 그녀가 전략과 계획을 세우는 동안에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캐리건이 신경 경로를 거닐며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군단을

살펴볼 때도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하지만 무언가가 달랐다.

그녀가 저글링의 거처를 방문했을 때, 녀석이 예전에는 들어 보지 못한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입구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앉아서 그녀가

반짝이는 거대한 덩어리처럼 한데 뒤엉킨 저글링들을 살피는 걸 지켜볼 뿐이었다.

녀석이 여전히 복종하는지, 아바투르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건 아닌지 보기

위해 케리건은 녀석에게 시험을 내렸다. "무리와 함께해라." 어디든 따라다니는 게

지겨워진 참이었다. "어서."

저글링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무언가 그녀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

있었다. 너무 영민했다. 너무—

지성이 있는 걸까?

"가라." 케리건이 더 강하게 명령했다. 하지만 저글링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더 가까이 다가왔다.

Page 26: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아바투르, 그녀는 머릿속으로 싸늘하게 내뱉었다.

이 녀석은 어째서 명령을 거부하는 거지? 죽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순간 번개 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너, 나랑 함께 있고 싶은 거구나."

저글링이 부드럽게 그르렁대며 즉시 달려와 그녀의 다리에 머리를 부딪혔다.

케리건은 몸에서 냉기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이건 애정인가? 예전에는

늘 그녀가 녀석에게 곁에 머물도록 명령했었다. 군단의 작은 일부인 녀석의 존재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녀석이 그녀 곁에

머물기로 선택했다.

작은 차이. 하지만 그 차이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아바투르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케리건은 저글링 무리가 한데 엉겨 있는

방을 뒤로하고 녀석에게 성큼 다가섰다. 늘 그랬듯이 녀석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빽빽하게 뒤엉켜 우글대는 군단의 잡음 사이에서 이 하나의 개체를 찾아 생각을

뻗었다.

녀석이 밝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케리건은 군단의 통일된 움직임에서 이상한 맥동을 하나 감지할 수 있었다.

Page 27: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독특한 펄떡거림. 다음 순간—저글링이 고개를 들고, 원래라면 가져선 안 될

다정함으로 그녀의 손에 머리를 부딪쳐 왔다.

케리건은 순간적으로 손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저글링이 그녀에게 닿으려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녀석의 이마를 매만지고, 손가락으로 왼쪽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녀석이 그르륵 하고 생전 처음 듣는 부드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케리건은 자기가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의심하면서 쓰다듬는 걸 멈추고 녀석의

머리를 가만히 누르고 있었다. 녀석이 다시 그르륵 하고 울었다. 믿기지 않지만, 그

소리에는 분명 만족감에서 오는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문득 의구심이 차올랐다. 저글링을 자신 곁에 둘 필요가 있었다. 아바투르가

녀석에게 어떤 조작을 가했는지 알아내야 했다.

"따라와." 그녀가 속삭였다.

그날 이후, 케리건은 저글링을 한시도 곁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녀석이 자기

뒤를 따라 신경 경로를 달려오게 하지 않고, 옆에서 걷게 했다. 이따금, 자기도

모르게 녀석의 머리에 손이 가 있곤 했는데,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주인 의식? 보호 의지?

Page 28: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하지만 어쩐지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녀가 흘긋 쳐다볼 때마다, 저글링이 밝은

눈으로 시선을 맞춰 오는 것도. 저글링은 케리건의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을 지켜보고 흡수했다. 다음 공격을 계획하고, 새로운 저그 종의 진화를

감독하는 일 따위를. 그럴 때 집중해서 녀석에게 닿으면 이상하고 불규칙한 분열이

느껴졌는데, 녀석이 배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느 날 밤, 아바투르가 저글링과 함께 있는 케리건을 찾아왔다. "효과는?" 그가

다가서며 발톱으로 그녀의 발치에 웅크리고 있는 저글링을 가리켰다.

"어느 정도는." 케리건이 아바투르를 주의 깊게 응시했다. "하지만 녀석은 명령에

응하지 않는다. 따르게 하려면 더 강한 의지를 발휘해야 해."

아바투르가 발톱을 하나 흔들며 조잘댔다. "그게 당신이 원했던 것, 맞음?" 그의

눈이 희미하게 빛났다. "저그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

케리건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의 발치에 있던 저글링이

꿈틀하더니, 시선을 돌려 아바투르를 응시했다.

"자가라는 내 명령에 복종해야 해." 그녀의 목소리에 노기가 어려 있었다.

"복종하지 않는다면 죽여야겠지. 자가라는 저글링보다 훨씬 강하고 군단에 중요한

존재다."

Page 29: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아바투르가 침묵하자 케리건의 분노가 솟구쳤다.

저글링이 달려들었다.

케리건이 명령한 것이 아니었다. 아바투르를 다루는 일은 한낱 저글링보다

그녀가 뛰어났다. 그런데도 녀석은 날개를 미친 듯이 펄럭이고 포효하며 아바투르를

공격했다. 아바투르 역시 포효하며 발톱을 휘두르려는 순간—

케리건이 아바투르가 저글링을 해하지 못하게 멈춰 세웠다. 저글링을 곁으로

물리기 전에 녀석이 그의 살점을 베는 것은 그냥 두었지만. 놀랍게도 저글링을

아바투르에게서 떼어 내는 데는 상당한 의지력이 필요했다. 눈에서 불을 뿜는

아바투르를 제자리에 붙잡아 두는 것보다 더.

"그만 가 봐라." 케리건이 명령하자 아바투르는 곧장 움찔하며 밖으로 나갔고, 그

자취를 따라 통로로 핏자국이 이어졌다.

케리건은 잠시 아바투르가 서 있던 자리를 미동 없이 응시했다. 곧 저글링이

그녀의 다리에 머리를 부딪쳐 왔다.

"내 명령도 없이 공격하다니." 그녀는 딱딱하게 말했지만, 아직도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군단에서 가장 열등한 개체인 저글링이

스스로 행동했다는 데 불안감을 가져야 할까? 아니면 자기 의지로 그녀를 위해

Page 30: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목숨을 건 것을 기뻐해야 할까?

케리건은 저글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녀석의 머리에 손을 얹고 군단에서의

녀석의 존재에 집중했다. 역시 이 저글링은 존재감이 두드러져서 찾기가 쉬웠다.

마치 백색소음 가운데서 번뜩이는 붉은 빛 같았다.

케리건은 저글링의 눈에 비친 자신을 보고, 녀석이 얼마나 자기 곁에 있고 싶어

하는지를 알았다. 녀석은 그녀와 함께 이 방에 있도록 허락받은 자신이

선택받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선택받았다, 그것이 케리건이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단어였다.

케리건은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저글링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녀석의 호기심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녀석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겠지.

문득, 아바투르가 이 저글링으로 실험을 진행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령에 따라 오랫동안 그녀의 곁을 지킨 끝에, 자기 나름대로 그녀를 아끼게 된 이

녀석을 말이다.

케리건은 녀석을 그냥 '저글링'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름을 지어 줄까?" 그녀가 느릿하게 물었다. 녀석이 이해를 못 한 것 같았다.

Page 31: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케리건이 녀석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이름 말이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부러진

뿔. 그게 너다." 그녀가 힘주어 말했다. "부러진 뿔."

저글링이 자기의 새 이름과 비슷한 리듬으로 크르르릉 하고 울었다.

"그래." 케리건이 말했다. "부러진 뿔."

저글링은 여러 번 크르르릉 하고 울더니, 만족스럽다는 듯이 예의 기묘하고 소름

끼치는 그르륵 소리를 냈다.

케리건은 그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단단해지는 것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

부러진 뿔은 자신이 갇힌 작고 차가운 방의 벽을 따라 느릿느릿 걸었다. 안 아픈

곳이 없었지만 천천히, 꾸준히 걷는 데 집중하면 머릿속에서 고통을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비쳐드는 불빛에, 그의 몸이 공포로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은 몸을 마비시켰던 불빛보다 훨씬 부드럽고 작았다.

벽에 있던 구멍이 다시 나타났다.

부러진 뿔은 그 자리에 멈춰서 뻣뻣하게 굳은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한 형체가

구멍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냥감 중 하나였다.

Page 32: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놈이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구멍이 사라지고, 다시 반들반들한 벽으로 바뀌었다.

사향처럼 달큰한 공포의 냄새가 부러진 뿔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는 곧

으르렁거리며 발톱을 세우고 사냥감의 연한 가슴팍으로 뛰어들 준비를 했다.

그 순간 온몸이 터질 듯한 고통이 그를 덮쳤다.

부러진 뿔은 괴성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놈들이 또 몸을 마비시킨 걸까?

아니었다. 움직일 수는 있다. 버둥대며 애쓴 끝에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사냥감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다시금 뜨겁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그를

관통했다. 이번에는 등부터 떨어지는 바람에 낫발이 밑에 깔렸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핑 돌았다.

그리고 칼날 여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머릿속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의 머리 바깥에서 그녀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부러진 뿔이 몸을 굴려 일어나자 피가 바닥을 가로지르며 줄무늬를 남겼고,

낫발은 꺾인 채 덜렁거렸다. 하지만 칼날 여왕은 거기에 없었다.

그것은 적 여왕이었다. 그녀가 내는 소리는 저그의 예리한 송곳니처럼 날카로울

뿐,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적 여왕이 뭐라고 고함치자 구멍이 다시 나타났고, 그녀는 방을 나갔다. 혼자

Page 33: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남은 부러진 뿔의 등에서 피가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웅크린 채 한참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몸을 마비시키는 불빛도

비쳐 들지 않았고 구멍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느릿느릿 벽으로 걸어가 몸을 쾅쾅 박아댔다. 곧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부러진 낫발이 바닥에 떨어졌다. 새로운 고통과 오래된 고통이 겹치며 온몸이

욱신거렸다.

얼마인지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벽이 열렸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을 때, 그를 괴롭히러 온 사냥감은 없었다. 벽만 떡 벌어져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구멍은 절단 장소가 아니라 좁은

통로로 이어졌다.

탈출구인가?

그는 엉겨 붙은 피 웅덩이 위에 놓인 자신의 부러진 낫발을 돌아봤다.

놈들이 자신을 계속 아프게 할 거라는 건 틀림없었다.

그는 웅크리고 앉아 구멍을 응시했다. 구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이

도망치고자 하는 욕구를 더욱 강하고 격렬하게 부추겼다. 어디선가 군단이 도망치고

있다. 군단이 탈출하고 있다. 나도 탈출해야—

Page 34: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하지만 뭔가 이상해!

그는 마치 군단과 일체가 된 것처럼 움직이며 몸을 일으켰다. 움직이는 것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군단을 위해—

하지만 여기에는 아무도 없어!

부러진 뿔은 포효하고 발톱으로 바닥을 긁으면서 힘겹게 뒤로 물러섰다. 고통이

등을 타고 사지로 퍼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벽에 있는 구멍에서 부드럽고 시원한 불빛이 손짓하듯 어른거렸다.

자유다.

아니야! 이건 잘못됐어!

부러진 뿔의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몸을 멈추기 위해

으르렁대고 포효하며 미친 듯이 날개를 퍼덕였다. 빛의 점들이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가서 곧 검은 점들에 먹혔다. 어쩐지, 굴복하고 앞으로 가면 고통이 멈추고,

자유로워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적 여왕이 원하는 것이다.

그는 다시 포효했고, 그의 분노가 방 전체에 울려 퍼졌다. 몸이 뻗대면서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마치 누가 양쪽에서 몸을 당기는 것처럼—

Page 35: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다음 순간 온몸을 마비시키는 불빛이 방을 가득 채웠다.

부러진 뿔은 바닥에 쿵 쓰러졌다. 고통이 잦아들었다. 그는 마비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출입구에 구멍이 또 하나 나타나더니 한 형체가 들어왔는데, 그녀의 연약하고

쓸모없는 앞발은 둥글게 꽉 쥐어져 있었다. 그녀가 그의 옆에 와서 웅크렸을 때,

그는 그것이 번뜩이는 두 눈에 얼굴의 절반을 가린 적 여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에게서 문득 칼날 여왕에게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지만, 그것과는

달리 날카롭고 뜨거운 감정이었다.

적 여왕이 뭐라고 길게 소리를 지르자, 그녀의 군단이 은색으로 반짝이는 것을

잔뜩 들고 쏟아져 들어왔다. 적 여왕은 놈들이 들고 온 은색 상자 중 하나를 들더니

부러진 뿔의 머리 위로 흔들었다. 파란 빛이 그의 눈을 비추었다. 그녀는 바로

그것을 던져 버리고, 밝은 은색 발톱을 집어 들고 그의 옆머리를 세게 후려쳤다.

고통에 찬 부러진 뿔의 울음소리는 간헐적이고 희미했다. 은색 발톱이 부러진

뿔의 갑피를 뚫고 들어가면서 적 여왕의 몸을 감싼 외피에 검은 피가 튀었다.

그녀의 찌푸린 이마에서 결의가 엿보였다. 사냥감 중 하나가 두려움 섞인 음성으로

그녀에게 외치자, 그녀가 분노에 찬 음성으로 대답했다.

Page 36: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부러진 뿔에게 보이는 건, 그의 피에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는 적 여왕의

몸통뿐이었다. 적 여왕이 바로 옆에서 자신의 머리를 파헤치고 있는데도, 그녀가

내는 소리는 먼 곳에서 나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마침내 작업이 끝났는지 그녀가 은색 상자를 집어 들고 다시 파란 불빛을

비추었다. 그러고는 답답하다는 듯이 신음을 뱉더니 방을 홱 나갔다.

나머지 놈들 역시 물건을 챙겨 그녀를 따라 나갔고, 벽은 다시 벽으로 돌아가

부러진 뿔이 도망칠 수 있는 구멍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직 몸이 마비에서

완전히 풀리지 않았지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해도 지금처럼 온몸이 심하게

욱신대는 상황에서 움직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옆으로 누웠다. 그는 벽에 비친 자신을, 바닥에 흥건히 스며드는 피를

응시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그의 생각은 산성 액체처럼 뜨겁고 독했다. 칼날 여왕도

타오르는 고치가 온몸을 쥐어짜는 이 느낌을 경험했으리라. 과거에 이놈들과 똑같은

사냥감이 거대괴수를 공격하고 저그를 죽인 일이 있었다. 칼날 여왕은 놈들을

발견하자마자 사지를 찢어발겼고, 부러진 뿔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녀의 증오와

결의를 이해했다. 칼날 여왕은 놈들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바닥을 굴러다닐 때까지

Page 37: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절단 장소를 떠올렸다. 적 여왕과 그 군단을 떠올렸다.

그도 그런 결의를 품을 것이다. 그녀를 갈가리 찢어발길 것이다.

#

대외비

통신 ID: 312290

자치령 국가 안보국

[삭제됨]이 필리파 브로드허스트에게 전송한 보안 교신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왜 현황 보고를 하지 않는 거지? 자네도 렌스키가 내

중개자고, 보안 채널을 통해서든 아니든 내가 자네한테 직접 연락하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나! 자네 때문에 이 작전 전체가 위태로워졌네, 필리파.

맹세컨대, 우리 감독 하에 또 [삭제됨]이 발생한다면 자네를 저그의 미끼로 사용해

주지.

이상, [삭제됨] 통신 종료.

###

대외비

Page 38: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통신 ID: 312293

자치령 국가 안보국

필리파 브로드허스트가 [삭제됨]에게 전송한 보안 교신

저는 당신의 직접적인 연락을 바란다고 렌스키 씨한테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말씀하셨다시피 저는 이곳의 보안 절차를 잘 알고 있고, 제가 보안 절차를 철저히

따른다는 건 그동안 제가 안보국에 전송한 교신을 보면 아실 겁니다. 네이선이 제

일에 흠집을 내려는 거겠죠. 사소한 차질은 있었지만 모두 계획대로 진행 중입니다.

이상, 브로드허스트 통신 종료.

###

대외비

통신 ID: 312301

자치령 국가 안보국

네이선 렌스키가 필리파 브로드허스트에게 전송한 보안 교신

필리파, 아직도 현황을 보고하지 않았더군요. 3일 전에 전송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사소한 차질'이라는 게 뭔지 알아야겠습니다. 당신의 실수에 대해

내 탓을 해서 좋을 건 없습니다.

Page 39: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이상, 렌스키 통신 종료.

###

대외비

통신 ID: 312310

자치령 국가 안보국

필리파 브로드허스트가 네이선 렌스키에게 전송한 보안 교신

현황 보고가 지연된 것은 예정에 없었던 추가 실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실험을 마치고 제 가설이 맞았다는 걸 확신했습니다. 저한테 결함이 있는 실험체를

주셨더군요.

눈먼 악마 작전이나 [삭제됨]에서의 제 작업은 모두 자치령에서 이전에 수행됐던

연구를 바탕으로 합니다. 저는 그 연구를 토대로 저글링의 뇌 구조를 연구했고, 척수

제어 장치 역시 그 연구를 바탕으로 제작했습니다.

하지만 눈먼 악마 작전의 실험체는 지금까지 수행된 그 어떤 연구의 저글링

실험체와도 같지 않습니다. 이번 실험체의 뇌 구조와 사고 과정은 이전의 저글링

실험체들과 현저하게 다릅니다. 이건 실수가 아닙니다. 저는 절차대로 실험체의 뇌

조직을 직접 스캔했습니다.

Page 40: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증거로, 역시 절차대로 제가 직접 캡처한 이미지를 첨부합니다. 왕성한 뇌내

활동이 보이시나요? 파란색 선들이 보이십니까? 이제 평범한 저글링의 뇌 구조를

보십시오. 활동성이 매우 낮다는 걸 한눈에도 아시겠죠?

제가 맡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추가 실험체나 추가 시간이

필요합니다. 선택은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이상, 브로드허스트 통신 종료.

###

대외비

통신 ID: 312311

자치령 국가 안보국

네이선 렌스키가 필리파 브로드허스트에게 전송한 보안 교신

실험체를 상처 없이 산 채로 포획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압니까?

2주의 시간을 더 드리죠. 당신이 다루고 있는 실험체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해서 실험에 적용하십시오. 우리의 최종 목표는 저글링뿐 아니라 군단 전체를

제어하는 것인 만큼, 돌발 상황에 적응하며 실험을 진행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상, 렌스키 통신 종료.

Page 41: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

부러진 뿔은 작은 불빛을 향해 어둠 속을 헤엄쳤다. 그 불빛은 점점 커졌고,

찰나였지만 칼날 여왕이 자신을 부드러운 눈길로 내려다보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졌다. 어둠도 사라졌다. 부러진 뿔은 절단 장소에 있었다.

그는 금속판 위에 있었고, 몸은 마비된 상태였다. 하지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서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그때, 갑자기 금속판이 덜커덕대며 수직으로 미끄러졌다. 몸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는 묶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서서히 천장이 사라지고 얼굴을 가리지 않은 적

여왕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양옆에서 불빛이 깜박이는 하얗고 평평한

것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실험체가 깨어났어요." 그녀가 말했다.

혼란이 부러진 뿔을 덮쳤다. 그녀의 소리는... 칼날 여왕의 소리 같았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그녀와 연결되어 그녀의 생각을 느낄 수 있었다. 칼날 여왕의

정신은 그를 속박하고 그에게 목적을 주었다. 하지만 적 여왕의 정신은 살갗에

소름이 돋을 만큼 불규칙한 에너지를 띠고 날뛰었다.

"아하,"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 목소리에 뇌

Page 42: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활동이 급증했습니다."

부러진 뿔은 온 힘을 그러모아 으르렁댔다. 적 여왕이 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럴 필요 없어." 그녀가 자기 무릎에 놓인 은색 상자를 바라봤다. "뇌

활동이 또 급증했군. 흥미로운데."

그녀는 부러진 뿔을 빤히 응시했고, 그는 가슴속에서 폭풍 같은 분노가 일었다.

어떻게 감히 칼날 여왕의 자리에 들어올 수 있었지? 어떻게 감히 그의 머릿속에 그

음성과 요구를 전달할 수 있느냔 말이다!

"얘기 좀 해 볼까?" 그녀가 말했다.

그는 으르렁댔다.

"물론, 네가 말을 하거나 내가 하는 말을 정말로 이해할 수는 없겠지." 그녀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이해하고 있겠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정확히 몰라도, 내가 너의

신경계에 연결돼 있다는 건 알고 있을 거야." 그녀가 손가락으로 하얀 모자를

만졌다. "그게 이 실험의 문제가 내 기술 때문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고. 분명히

알아 두시면 좋겠군요, 네이선."

부러진 뿔은 꼼짝하지 않는 몸을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적

Page 43: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여왕이 내는 이상한 소리가 변형되어 강제로 그의 머릿속에 전달됐다.

적 여왕이 일어나서 은색 상자를 허리께에 누른 채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몸을 가까이 기울였지만, 이상한 소독약 냄새 때문에 그 몸에 흐르는 피의 짠 내를

거의 맡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군." 그녀가 그의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넌 내 의지를 이해하면서도—" 그녀가 은색 상자를 내려다봤다. "그걸 거부하고

있지." 그녀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그녀를 거역한

적이 있어? 케리건 말이야."

그녀의 입 모양을 보자 공포가 엄습했다. 그녀의 입이 저렇게 곡선을 그리며

올라갈 때마다 그는 고통의 늪에 빠졌다.

"다음 단계는," 적 여왕이 부러진 뿔에게서 떨어지며 말했다. "이 구조적 차이의

원인을 알아내는 겁니다." 그래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그녀가 부러진

뿔을 바라봤다. "하지만 우리는 성공할 거야. 네 머릿속을 들여다볼 거야."

부러진 뿔의 분노와 저항 어린 포효는 목구멍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

거대괴수는 테란 거주지로 가득한 행성, 앙드라에 접근했다. 케리건은 신경 중추에서

Page 44: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검은 은하를 배경으로 행성이 점점 커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부러진 뿔도 그녀의

옆에서 가까워지는 행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하나 되어 휘몰아치고 소용돌이치는

군단 전체에 정신을 집중했다. 저글링들이 제일 먼저 공격에 나서서 저 아래 펼쳐진

도시 가장자리의 작은 자치령 정부 건물까지 길을 뚫어 줄 것이었다. 그곳에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든 컴퓨터가 있었다.

바닥에 발을 끌며 걷는 부러진 뿔이 그녀의 다리에 부딪혔다. 거대괴수가

요동치며 포효했고, 그들은 앙드라의 대기권에 진입해 구름과 불꽃을 뚫고 마침내

견고한 땅에 착륙했다.

케리건이 눈을 번쩍 떴다.

군단이 물결치는 하나의 리본처럼 거대괴수에서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케리건은 군단을 세 개의 무리로 나눠 보내며 미소 지었다. 각각의 무리가 도시를

지나며 곳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터였다.

그녀가 거대괴수의 출구로 향하자 부러진 뿔이 그 뒤를 따랐다. "너도 저기에

있어야 하는 건데." 케리건이 싸늘한 공기 속으로 발을 내디디며 그에게 말했다.

멀리서 끊임없이 파괴음이 들려왔다. "내가 널 너무 옆에 두고 응석을 받아 주는 게

Page 45: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아닌가 싶구나."

부러진 뿔이 불만인지, 기대인지 알 수 없는 소리로 부드럽게 으르렁댔다.

저 앞에 작고 볼품없는 자치령 정부의 건물이 보였다. 주변을 지키는 테란이

없는 걸 봐선 버려진 것 같았다. 그녀는 테란의 주의를 목표물에서 돌리기 위해

일부러 군단을 반대편으로 보냈다.

하지만 저 안에 테란 병사들이 있다면? 이것이 함정이고, 놈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그녀와 군단을 단절시켜 군단이 기능을 못 하게 흩뜨려놓을 작정이라면?

"부러진 뿔." 케리건이 말했다. "네가 날 위해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그녀가 부러진 뿔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잠시 정신을 둘로 나누어 녀석의

머릿속에 바로 지시를 전달했다. 녀석이 저항 없이 지시를 받아들이는 게 느껴졌다.

케리건은 잠시 군단에서 정신을 분리하고 부러진 뿔을 내려다봤다. 그것이

차이였다. 녀석에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도록 강제할 수도 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 저글링은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 행동했다.

케리건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재빨리 정신을 군단에 집중하며 부러진 뿔을

건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녀석이 강제가 아닌 지시에 따라 창문을 깨고

들어가는 걸 지켜봤다. 부러진 뿔은 아무도 없는 밝은 사무실과 컴퓨터의 냄새를

Page 46: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맡으며 돌아다녔다. 직원들이 급하게 빠져나간 모양인지 컴퓨터 화면들은 기밀

정보를 고스란히 띄운 채 빛나고 있었다.

케리건은 미소를 지었다. 바라던 대로였다.

생각의 한 편으로 파괴의 춤을 추는 군단을 지휘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부러진

뿔을 통해 녀석이 여러 대의 컴퓨터 화면 사이를 이동하며 보는 것을 주시했다. 그

빛이 그녀의 머리 뒤편에서 깜박였다. 부러진 뿔은 지칠 줄 모르는 힘으로 벽과

닫힌 문을 부수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찾아냈다. 이름과 지도를.

케리건의 귀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테란 병사들을 태운 군 호송 차량이 텅

빈 도로를 엄청난 속도로 질주했다. 그리고 건물 앞에 멈춰섰다.

부러진 뿔이 아직 안에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나와! 그녀가 거대괴수로 돌아가며 녀석에게 외쳤다.

녀석이 긴장하고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움직이는 게 보였다. 부러진 뿔은 왔던

길을 되짚어 이동했고 케리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녀석이 갑자기 몸을 돌려 컴퓨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안 돼! 그녀가 강력한 의지를 담아 명령했다. 돌아와.

Page 47: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녀석이 재빨리 몸을 돌렸지만, 건물은 이리저리 뒤얽힌 이상한 미로 같았다.

케리건은 녀석의 시야에서 테란 병사를 발견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케리건은 녀석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

대외비

통신 ID: 312310

자치령 국가 안보국

필리파 브로드허스트가 네이선 렌스키에게 전송한 보안 교신

지난 이틀간 저글링의 뇌 신경계를 조사했습니다. 직접 관찰을 포함해 실험체를

죽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시술을 다 했죠.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 실험체는 지각력이 있습니다.

저그는 본래 군체 의식에 종속되어 단일 개체로 행동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기술도 그 원칙을 기반으로 개발된 것이고요. 따라서 이번 실험체처럼

독립적으로 행동하며 군체 의식 속에서도 스스로 행동 범위를 결정할 수 있는

저그의 신경계에 우리가 개발한 장치를 이식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Page 48: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20983번 실험체는 앞으로의 연구를 위해 저한테 넘겨주시고, 눈먼 악마 작전은

다른 실험체로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상, 브로드허스트 통신 종료.

###

대외비

통신 ID: 312310

자치령 국가 안보국

네이선 렌스키가 필리파 브로드허스트에게 전송한 보안 교신

필리파, 우리는 프랑켄슈타인 판타지나 실현하라고 당신을 고용한 게 아닙니다.

20983번 실험체는 테란 자치령의 자산입니다. [삭제됨]에서의 당신 연구도 테란

자치령의 자산입니다. 그 실험체를 이용해서 눈먼 악마 작전을 완료하도록 하십시오.

이상, 렌스키 통신 종료.

###

대외비

통신 ID: 312310

자치령 국가 안보국

Page 49: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필리파 브로드허스트가 [삭제됨]에게 전송한 보안 교신

네이선, 정말 멍청하시네요. 지금 제 연구 상황이 어떤지 이해를 못 하시는

건가요? 이대로 작전을 진행한들 자치령에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이상, 브로드허스트 통신 종료.

###

통신 ID: 312310

자치령 국가 안보국

네이선 렌스키가 필리파 브로드허스트에게 전송한 보안 교신

그건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필리파. [삭제됨]으로부터 직접 하달된

명령입니다.

지시받은 대로 눈먼 악마 작전을 계속 진행하십시오.

이상, 렌스키 통신 종료.

#

부러진 뿔은 환한 방에서 고통에 무감각해진 만신창이의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떠올렸다.

거대괴수의 신경 중추에 있는 부드러운 곡선 공간을. 칼날 여왕은 그곳에서

Page 50: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조언자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는 칼날 여왕의 목소를 들으며 그들을 연결하는

맥동에 집중하곤 했다. 그리고 이해했다.

지금도 이해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사냥감들은 압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것이 군단의

힘이었다. 그는 놈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 예상치 못한 순간에 허를 찌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곳, 이 끔찍한 장소에서는 놈들이 군단이며 자신이 사냥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벽에 비친 또 하나의 부러진 뿔을 바라봤다. 얼굴과 몸에는 끔찍한 검은색

선들이 가득했고, 왼쪽 낫발은 딱딱하게 굳은 그루터기 같았다. 가장 최악인 것은 적

여왕이 그의 생각을 파냈을 때, 그를 칼날 여왕에게서 잘라 냈을 때 남긴 보이지

않는 상처였다.

그는 만신창이였다. 하지만 증명할 것이다. 자신이 아직 칼날 여왕에게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것이다.

그는 적 여왕의 기이한 영향력이 몸서리치게 싫었지만, 그 힘에 저항하는 걸

멈추기로 했다. 저항하면 놈들이 마비 불빛을 비출 것이고, 몸이 마비되면 공격할 수

Page 51: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없다.

그래서 그는 놈들이 시키는 곳을 향해 걷고, 그를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빛의

불꽃으로 태우는 덫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는 놈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몸이 자신의 의지를 배신하게 두었다.

놈들이 마비 불빛을 사용하는 걸 멈췄다.

마침내 그의 인내가 보상을 받은 것이다. 그의 방에 있는 벽이 열리면서 절단

장소가 나타났다. 안으로 들어가 금속판 위에 기어오르고 싶은 충동이 그의

머릿속을 요동쳤다.

그는 발을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얼굴의 절반을 가린 테란들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적 여왕이 금속판 옆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기다란

은색 발톱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부러진 뿔은 금속판 옆에 멈춰 서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적 여왕이 고개를

기울이고 뭔가를 말했다. 더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칼날 여왕처럼

그의 머릿속에 말하게 해 주었던 하얀 모자를 치워 두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금속판 위로 뛰어오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는 충동에 굴복하여

금속판 위로 뛰어올랐고, 그의 발밑에서 금속이 우그러졌다. 테란 중 일부가 놀라서

Page 52: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뒤로 물러섰으나 그를 바라보는 적 여왕의 시선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눈으로 방을 빠르게 훑어봤다. 군단은 흩어져 있었고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놈들에겐 공격할 발톱이 없었다. 이제 이 절단 장소에서 마비 불빛이

작동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갑자기 엎드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는 이 충동을, 무시했다.

적 여왕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무언가를 말했다. 그가 고개를 휙 쳐들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뒤로 물러섰다.

다음 순간 그는 적 여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고통을 참으며 금속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냥감에 달려들어 발톱으로 희미하게 반짝이는

천을 단번에 꿰뚫었다. 피가 솟구쳤다.

놈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앞으로 튀어 나가며 본능에 따라 거칠고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무조건 달려들어 포효하고 으르렁대며 뜨거운 피를 뿌렸다.

군단과 함께 싸울 때와 달리 그는 혼자였고 불안정했다.

그는 피로 흥건한 바닥을 미끄러지고 또 달리면서, 거대한 금속 구조물을

Page 53: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들이받고 발톱으로 찢어 내부의 빛나는 부속물을 끄집어냈다.

그와 동시에 방이 컴컴해졌다가 불그스름한 안개에 다시 밝아지며 사이렌이

비명을 질렀다. 남아 있는 군단이 앞발로 벽을 두드렸고, 부러진 뿔은 곧장 놈들에게

달려들어 숨통을 끊고 놈들이 조각난 사지와 벽을 적시는 핏물에 지나지 않을

때까지 찢고 찢고 또 찢었다.

그때 찌그러지고 왜곡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이게 효과가 있는지 보자고." 적 여왕이 말했다.

부러진 뿔이 피 웅덩이에서 휘청거렸다. 몸을 홱 돌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혼자였다.

"스캐너가 작동을 안 하잖아. 안 돼, 안 돼, 안 돼. 빌어먹을!"

부러진 뿔이 포효하며 벽을 쿵 들이받자, 방 전체가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벽에서 검은 사각형이 나타났다. 그를 바라보는 적 여왕의 얼굴에선 피가

몇 줄기 흘러내렸고 하얀 모자는 삐뚤어져 있었다.

"우릴 속였구나." 그녀가 말했다. "그동안 이식한 장치가 작동하는 척 행동한

거였어!" 그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 눈에 당혹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어떻게

그런—"

Page 54: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부러진 뿔은 눈앞을 하얗게 태우는 분노를 느끼며 그녀에게 돌진했다. 하지만

그녀를 공격했을 때, 단단하고 견고한 무언가에 부딪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다는 건 네가 똑똑하다는 뜻이겠지." 그녀가 말했다. "흔한 저글링보다

훨씬." 그녀의 벌어진 입에서 이빨이 보였다. "우리는 소통할 수 있어. 우리는... 그래,

합의를 할 수 있을 거야.

그는 온 힘을 실어 그녀에게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방어막에 대응하며 뒷다리로

착지했다. 그리고 다시 뛰어들었다. 또 한 번. 적 여왕이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녀가 지껄이는 소리는 분노의 안개 속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방어막에 금이 갔다.

부러진 뿔과 적 여왕은 동시에 그것을 봤고, 그 얇은 선이 그녀를 둘로 갈랐다.

그녀의 입이 헉 하고 벌어졌다. 다음 순간 그녀가 그를 살폈다.

그리고 사라졌다.

부러진 뿔이 포효하며 달려들자 방어막은 수천 개의 날카로운 발톱으로 쪼개져

더 작고 낯선 방으로 향하는 그의 몸을 긁어내렸다. 그 안에선 지독한 공포의

냄새가 났다.

그곳에 구멍이 있었다. 부러진 뿔은 구멍을 지나 좁고 어두운 통로로 들어섰다.

Page 55: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저 앞에서 무언가가 휙 움직였다.

그는 달렸다.

미친 듯이 모퉁이를 돌며 질주하는 그에게 적 여왕 악취가 훅 풍겨 왔고, 그의

몸에선 뜨거운 증오가 열의 파도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적 여왕이 있었다. 저 앞에. 뒤를 돌아보는 그녀의 눈이 공포로 번들거렸다.

그는 전투의 광기가 흘러넘치는 몸에 힘을 실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적 여왕이

벽에 쾅 부딪히며 앞발로 금속을 눌렀다. 구멍이 나타났다.

그는 뛰어올라—

적 여왕의 등에 착지하여 그대로 그녀의 몸을 타고 부드러운 땅에 내려섰다.

그녀가 번들거리는 시뻘건 조각들이 되어 나뒹굴 때까지 물어뜯고 발톱으로

찢어발겼다. 그녀의 군단을 파괴해야 한다. 다른 놈들이 더 있다. 그가 절단

장소에서 죽인 놈들은 수가 너무 적었다. 적 여왕을 죽였으니, 그 사냥감들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곳에는 더 파괴할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부러진 뿔은 만족감과

고양감에 취해 비틀대며 적 여왕의 시체에서 발을 뗐다. 그는 생각을 뻗어 칼날

여왕에게 닿으려고 시도했다.

Page 56: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공허만이 있을 뿐이었다. 승리도 그에게

군단을 되돌려주지 못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처음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가 있는 곳은 검은 흙이

드문드문 보이는 광활한 바위 평야였다. 머리 위에선 별들이 소용돌이와 여러

갈래의 잔상을 남기며 하늘을 수놓았고 그 모습이 칼날 여왕을, 그녀의 밝은 눈을

떠오르게 했다.

그녀가 저 바깥에서 군단과 함께 거대괴수를 타고 항해하고 있다.

그는 차가운 땅에 앉아서 별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평온했으나, 곧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과 함께 목구멍에서 이상하게 타는 맛이 났다. 그는 갑작스레 덮쳐온

혼란에 몸을 버둥대며 벗어나려 애썼지만, 순간 검은 점들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그는 발톱으로 바위를 팠다.

그 검은 점들은 점점 커지고 커져 이내 시야에서 모든 것을 지워 버렸다.

#

케리건은 신경 중추에 서 있었다. 앙드라가 그녀의 아래서 불탔다. 녹색의 지표면

곳곳에 검은 연기와 시뻘건 불길이 피어올랐다.

녀석을 두고 왔다. 부러진 뿔을. 녀석을 보내 자기 대신 죽게 했다.

Page 57: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하지만 마땅히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던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가슴 한쪽이

마비된 듯한 이상한 감각이 느껴질 뿐이었다. 공허. 그곳에 있었던 무언가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특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었을 수도 있고.

앙드라의 지표면에서 수십만 마리의 저글링이 하나가 되어 테란 문명을 파괴해

나갔다. 여기서 수천 마리가 죽겠지만, 케리건은 이곳에서 원하는 정보를 가지고

나갈 것이다. 그들은 군단이기 때문이다. 군단은 개개가 아닌 전체로서만 완전했다.

전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한 개체의 죽음을 슬퍼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지금

그 빈자리를 메꿀 수 있는 개체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케리건은 불타오르는 앙드라를 보면서 그 이름, 부러진 뿔을 생각했다.

* * *

Page 58: Spiritual Journal · 2020. 8. 11. · 눈먼 악마 작전 카산드라 클라크 통신 ID: 309132 자치령 국가 안보국 즉 전파 요망 앙드라 남반구에서 저의 적대적

글: Cassandra Clarke

편집: Chloe Fraboni

프로듀서: Brianne Messina

세계관 자문: Madi Buckingham, Sean Copeland

크리에이티브 자문: Jeff Chamberlain, Kevin Dong, George Krstic, Ryan Quinn, Ryan

Schutter

도움 주신 분: Thomas Floeter, Martin Frost, Felice Huang, Chungwoon Jung, Jaclyn Lo,

Alexey Pyatikhatka, YuSian Tan